당신은 지금 ‘껍데기’를 사랑하고 계시진 않나요?
저는 한동안 외형에 집착했습니다.
이력서를 멋지게 쓰는 법, 사진 보정, 말투 포장,
겉으로 완벽해 보이면 내 삶도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논어의 '팔일'편을 읽다 그 말에 멈춰 섰습니다.
"제후가 팔일로 춤을 추니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당이 마치 조정 같구나!'"
한 줄짜리 이 문장에서 공자는 아주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합니다.
"이건 너무 지나쳤다"
"예"의 의미가 왜곡되고 있음을,
형식이 본질을 짓누르고 있음을 그는 슬퍼하며 꾸짖습니다.
팔일(八佾), 그 속에 감춰진 깊은 뉘앙스
'팔일'이 뭔가요? 단순한 춤 아니에요?
‘팔일(八佾)’은 고대 제례에서 사용된 '의식무(儀式舞)'입니다.
일(佾)은 춤추는 열을 뜻하고, 한 열에 8명씩 서는 게 '팔일'이죠.
천자만이 쓸 수 있었던 권위의 상징, 그게 팔일입니다.
하지만 논어 속에서는 제후가 팔일을 사용합니다.
즉, 자기 자리가 아닌데도 그 격식을 흉내 낸 거죠.
공자는 그런 형태를 보며 속으로 씁쓸해합니다.
"사당이 조정 같도다"
사당은 조용히 조상을 기리는 공간입니다.
그런데 권위와 자랑, 과시로 뒤덮인 모습 그건
더 이상 ‘예(禮)’가 아니었습니다.
공자는 왜 '예'에 그렇게 집착했을까요?
우리는 흔히 '예'를 답답한 전통이나 불편한 형식으로 오해합니다.
하지만 공자에게 예는 단지 포맷이 아닙니다.
예는 '사람 간 경계와 조화를 만들어내는 기술'입니다.
누가 위고 누가 아래인지, 언제 말하고 언제 멈춰야 하는지,
어떻게 감정을 다스리고 존중을 표현할지
이 모든 것이 예를 통해 가능해졌습니다.
공자는 알고 있었습니다.
형식을 망치면 마음도 망가진다는 것을요.
예를 흐트러뜨리는 것은 단지 예의 없음이 아니라,
'공동체를 흔드는 파열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겐 어떤 '팔일'이 있을까요?
예전엔 팔일이 춤이었지만,
지금의 팔일은 SNS일 수도, 스펙일 수도, 말뿐인 겸손일 수도 있습니다.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텅 빈 겉치레.
공자가 꾸짖었던 건 그런 허위의식과 권위의 남용입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과도하게 포장하고 있는 모습도
그 시절 제후의 팔일과 다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진짜는 조용하다. 중심은 드러내지 않는다
공자가 사당을 바라보며 조정(왕의 정치공간) 같다고 말했을 때,
그 안엔 깊은 슬픔이 있었습니다.
진짜가 사라지고, 본질이 껍데기에 눌려버리는 세상.
이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께 한 가지만 조심스럽게 제안드리고 싶습니다.
"혹시 나도, 내 삶의 '팔일'을 너무 사랑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지금 이 순간, 우리의 겉보다 속이 더 따뜻해지기를,
진짜 중심이 다시 빛나기를 소망합니다.
예는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입니다.
공자의 눈물과 분노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요.